1 고대[편집]
2 삼국시대[편집]
3 고려시대[편집]
4 조선시대[편집]
허준[1]
개요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허준의 생애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이 본격적으로 의료행위를 시작 한 후의 삶을 세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 셋째,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저서
허준은 어의로 재직하면서 내의원의 의학서적 집필을 도맡았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8종이 있으며, 크게 네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종합 임상의서의 집필로, 『동의보감』(1613)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일상생활에 요긴한 한글 번역이 딸린 의서로,『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이상 1601) 등이 그것이다. 책은 각각 아이의 해산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급 상황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소아전염병인 천연두에 대한 의학적 대응을 실었다. 최근에 연대 미상인『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이 허준의 저작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가정상비약인 납약을 올바로 쓰는 지침을 담고 있다.
셋째, 전염병 전문의서로,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벽역신방(辟疫神方)』(이상 1613)의 편찬이 그것이다. 『신찬벽온방』은 열성 질환인 온역(瘟疫: 오늘날의 급성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벽역신방』은 1613년 국내에서 첫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넷째, 학습용 의학교재인데, 허준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1581)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典醫監)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책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 허준의 책 중 가장 주목할 책은『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왕명으로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아 1613년(광해 5)에 출간되었다. 애초에는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 유의(儒醫) 정작(鄭碏), 다른 어의인 양예수(梁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 5인의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서 허준이 단독으로 책임을 맡아 책을 완성시켰다.
- 1608년(선조 41) 유배 이후 허준은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집필해냈다. 허준은 양생(養生)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의 분량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 회복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의학의 제공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질병사의 관점에서 볼 때, 『벽역신방』도 크게 주목을 끈다. 허준은 성홍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 미지(未知)의 병이 홍역을 비롯한 유사한 질환과 구별되는 병임을 밝혔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제마 [1]
개요
- 이제마(李濟馬)는 전주이씨로 태조 이성계의 고조(高祖)인 목조(穆祖)의 2남 안원대군(安原大君)의 19대손이다. 1837년(헌종 3) 3월 19일 갑신일 오시(午時)에 함경남도 함흥군 주동사면 둔지리 사촌에 있는 반룡산(盤龍山) 자락 아랫마을에서 진사(進士) 이반오(李攀五)와 경주김씨 사이에서 장남이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 호는 동무(東武)이고, 자는 무평(懋平) 또는 자명(子明)이다. 초휘(初諱)는 제마(濟馬)라 하였으나, 전주이씨 안원대군파 선원속보(璿原續譜)에는 그의 이름이 섭운(燮雲), 섭진(燮晉)으로 되어 있다.
이제마는 30세를 전후해서 함흥에서 정평으로 가던 중 어떤 객사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 안방 아랫목에 글씨를 쓴 종이가 붙여 있었다. 매우 뜻있는 내용이 적혀 있으므로 주인에게 원본을 청하여 한 달 기한으로 책을 빌려 문도 한창연(韓昌淵)에게 베끼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의 『명선록(明善錄)』이었다. 이후 이제마는 운암을 조선의 일인자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 이제마는 1875년(고종 12) 그의 나이 39세에 무과에 등용되어 다음해에 무위별선(武衛別選) 군관(軍官)으로 입위(入衛)되었다. 1886년(고종 23)에 진해현감겸병마절도사(鎭海縣監兼兵馬節度使)에 제수되어, 이듬해 2월 현감으로 부임하여 1889년 12월에 퇴임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의 저술에 착수하여 1894년 4월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상하 2권을 저술하였다. 1896년에 최문환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제수되고, 이듬해인 1897년에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98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그는 함흥에서 1900년 가을까지 한약국(韓藥局)인 보원국(保元局)을 경영하다가 그의 세수(歲壽) 64세가 되는 1900년(광무 4) 9월 21일 오시(午時)에 문인(門人) 김영관의 집에서 그의 생을 마감한다.
-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 6월에 그의 문인들이 모여 생전에 개편을 끝내지 못하였던 『동의수세보원』의 증보판을 출판하였다. 이 증보판은 성명론(性命論)·사단론(四端論)·확충론(擴充論)·장부론(臟腑論)·의원론(醫源論)·광제설(廣濟說)·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 등 7편으로 되어 있다.
-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格致藁)』등이 있다.
허임 [2]
- 본관 하양(河陽). 침구에 뛰어나 선조 때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동반(東班)의 위계(位階)를 받았다. 1612년(광해군 4) 허준(許浚)과 함께 의관록(醫官錄)에 기록되고, 1616년(광해군 8) 영평현령(永平縣令)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양주목사(楊州牧使) ·부평부사(富平府使)를 거쳐 1622년(광해군 14)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침의(鍼醫)라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1644), 《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 등이 있다.
- 우리 나라 침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름 난 의학자. 전라도 나주의 노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병 때문에 의사의 집에 가서 잡일을 하면서부터 의술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침구술을 익히는 데 특별한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침구술은 점차 국내외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그리하여 그는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시의(侍醫)로까지 등용되었다. 그는 의료 활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켜야 의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1644년에는 자신의 오랜 의료활동 경험을 종합하여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을 편찬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침구학의 기초 이론과 우수한 치료 경험들을 종합했을 뿐아니라 이전의 의학책들에 잘못 씌어진 침혈들의 위치와 침혈잡는 방법들을 바로 잡고 치료 효과가 높은 새 침혈들을 찾아서 밝혀놓았다. 그리고 새롭고 독특한 침구보사법(鍼灸補瀉法)들을 내놓았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한의학대사전, 한의학대사전 편찬위원회
5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한의약 말살정책을 펼친 점, 왕실에 한의의료기관을 폐쇄한 점 등이 한의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한의사 출신이 많은 편이다
1. 방주혁 선생
1)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경상남도 출신이며 한의사 가문 출신. 28세에 시종관 벼슬에 전의(典儀) 직위에 내정되는데, 이때 국권 침탈(경술국치)이 일어나자 오히려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46세(1925년) 이후에는 중국의 상해 임시정부 동지들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코자 자진해서 중국에 수차례 걸쳐 들어가기도 했다. 이때 이시영(신흥무관학교 설립자)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일제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감시됐다. 해방 후 방주혁은 정치인이자 한의사로서 활약했다. 이시영 부통령의 정치 고문, 민주당 최고위원 조병옥 정치 고문, 민주국민당 정치 고문을 지냈다. 국민구국정치운동을 전개했고,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정책 건의를 했으며, UN 사무총장에게 한국의 UN 가입 필요성을 건의했다.
2) 한의사로서의 삶
방주혁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지만, 한의사로서도 대한민국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데 성공한다. 방주혁 선생은 한의과대학 설립, 한의사제도를 창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47년 행림학원 이사로 활동하며 한의과대학 설립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동양의약대학 재단을 설립하고 문교부의 인가를 얻는 과정에서 박호풍 학장과 함께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동양의약대학 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동양의약대학은 지금의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이다.)
1951년 6·25전쟁 발발 중에는 부산 피난 시절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김영훈(金永勳), 박호풍(朴鎬豊), 박성수(朴性洙)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시 화동 경기중학교 옆에 ‘자도한의원’을 개원하여 진료했다. 방주혁은 제1·2회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위원을 지냈으며, 1950년대 내내 대한한의사협회 고문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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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우규 의사
강우규(姜宇奎, 1855년 4월 20일 ~ 1920년 11월 29일)는 일제 강점기의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자(字)는 찬구(燦九) 호(號)는 왈우(日愚). 1919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였으나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거사에 실패하였다. 한의사 독립운동가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오늘날에도 서울역 광장에 가면 강우규 의사를 추모하기 위한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전쟁기념관이 2019년 03월 호국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그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서울역 인근의 서울역버스환승센터 정류소 명칭을 '서울역버스환승센터.강우규 의거 터'로 병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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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 으로 이사하여 한약방을 열었으며 또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뜻있는 동료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의논하였다.
1915년부터는 요하현(饒河縣)으로 옮겨 산 뒤에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주 내왕하면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꾀하였다. 그리고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1917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 길림성지부장(新韓村老人團吉林省支部長)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 해 5월 노인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이에 분개하여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해 일본총독 등 요인 암살을 결심하였다.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 동지와 거사계획을 세웠다. 8월에 서울에 잠입해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부임차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해 마차에 오를 때,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철이사(滿鐵理事),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거사에서 총독 사이토는 화를 입지 않았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년 3월 경성지방법원 1회 공판 당시 최자남·허형·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되었다.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출처-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한의사로서의 삶
강우규 의사는 독립운동가보다 한의사로서의 삶을 먼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활동하였으며, 뛰어난 의술로 30대 초반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전해지며, 이후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에 단천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선생을 만나 55세의 나이에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출처-대한한의사협회
실제로 함경도나 만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박경리의 토지 2부에서도 등장한다. 의료활동을 했던 행적을 따라서 '강 의원'이라고 등장하며 토사곽란에 시달리는 주갑이를 치료해 주며, 주갑이는 강우규를 따라서 만주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작중 유일한 실존인물이라고 한다.